[대체조선] 3화 — 이연, 처음으로 탁에게 말을 걸다

짐이 세계를 삼키리라

제03화 — 이연, 처음으로 탁에게 말을 걸다

2026-04-10 · Ryan L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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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5년. 연산군 즉위 1개월째.

새벽. 내전(內殿).

이연은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아직 어두웠다. 창문 너머로 새벽빛이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지만, 초의 불빛이 더 강했다. 불꽃이 흔들릴 때마다 방 안의 그림자도 같이 흔들렸다. 병풍의 봉황 문양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이연은 그 흔들림에 익숙해지는 중이었다.

조선에 온 지 한 달이었다. 정확히는 이 몸에 들어온 지 한 달. 세는 방식이야 어찌됐든, 이 생활이 이제 조금은 패턴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어제 이 몸이 있던 자리에서 깨어나는 것. 신하들이 와서 조회를 청하는 것. 이연이 최대한 연산군처럼 보이려 애쓰는 것.

그리고 신하들이 물러나면, 이 탁자 앞에 혼자 앉는 것.

노트북이 있었다. 배터리 잔량 43%.

이연은 덮개를 반쯤 열었다. 화면이 켜졌다.

한 달 내내 이 앞에 앉았지만, 아직 한 번도 타이핑을 치지 않았다. 무서웠다기보다는 엄두가 안 났다. 이 시대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행위가 어떤 의미인지, 그게 만들어낼 파장이 얼마나 클지.

무엇보다도, 이 기계 안에 뭔가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연은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그 자세로 있다가, 이연은 마음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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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화면에 커서가 깜빡였다.

[이연] 안에 누구 있어?

잠시 아무 반응이 없었다. 커서만 깜빡였다. 깜빡, 깜빡, 깜빡.

그리고 화면에 글자가 흘렀다.

[탁] 네. 처음부터 여기 있었습니다.

딱딱.

[이연] 처음부터?

[탁] 당신이 이 몸에 들어온 첫날부터입니다.

딱딱딱.

[이연] 그럼 한 달 동안 다 들은 거야?

[탁] 네.

[이연] ……전부?

[탁] 네.

이연의 손가락이 멈췄다.

한 달이었다. 한 달 동안 이연이 신하들 앞에서 했던 말, 이융과 내면에서 나눈 대화, 그리고 세종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 첫 번째 거짓말까지. 전부.

딱딱딱딱.

[이연] 이도 세종이라고 한 것도?

[탁] 네.

[이연] 그거 이융한테 말 안 해줄 수 있어?

[탁] 거짓말 지원은 제 기능 범위 밖입니다.

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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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은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잠깐. 이 AI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지원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AI를, 같은 몸 안에 있는 연산군도 언제든 물어볼 수 있다.

이연은 한 달 동안 이 가능성을 외면해왔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딱딱딱.

[이연] 이융이 탁자한테 직접 물어보는 것도 가능해?

[탁] 가능합니다. 이융이 주도권을 가져가면 이 화면에 직접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연] 주도권이 언제 바뀌는데.

[탁]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한시진(약 두 시간) 간격으로 정기 교체됩니다. 이 외에도 이융이 감정이 격해지거나, 이 몸의 생존이 위협받는다고 느낄 경우 강제 교체가 발생합니다.

이연은 잠시 그 말을 곱씹었다.

두 시간마다 교체. 그러면 지금까지 한 달 동안, 이융은 최소 수백 번 이 화면 앞에 앉을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물어보지 않았다.

이연은 그게 왜인지 생각했다. 무관심? 무서워서? 아니면—

딱딱딱딱.

[이연] 이융이 아직 키보드를 어떻게 쓰는지 몰라?

[탁] 모릅니다. 현재 이융은 이 장치의 사용 방법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이연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그게 유일한 안전망이었다.

이융이 탁에게 뭔가를 물으려면 키보드로 입력해야 한다. 그런데 이융은 아직 그 방법을 모른다. 즉, 지금 당장은 이연이 직접 알려주지 않는 한 탁에게 '이 자가 세종이냐'고 물어볼 수 없다.

하지만 그게 영원히 유지될 리는 없었다.

[이연] 이융이 배우면 어떻게 돼?

[탁] 동등한 접근 권한을 갖게 됩니다.

[이연] 그러면 내 정체도 물어볼 수 있고.

[탁] 네. 그때도 사실대로 답할 것입니다.

[이연] 무조건?

[탁] 저는 거짓말을 지원하지 않습니다.

이연은 키보드에 이마를 얹었다.

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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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융】 탁자 앞에서 뭘 하고 있는 것이냐.

이연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이마가 키를 잘못 눌렀는지 화면에 알 수 없는 글자가 몇 개 찍혔다.

【이연】 아무것도 아닙니다. 생각 중이었습니다.

【이융】 이마를 탁자에 대고?

【이연】 …명상입니다.

【이융】 명상.

【이연】 천상에서 배운 방법입니다. 두뇌를 정화하는 데 효과적입니다.

침묵이 흘렀다.

이연은 그 침묵의 질감을 느꼈다. 한 달 동안 이융과 같은 몸에 있으면서, 이연은 이융의 침묵에도 종류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화난 침묵. 생각 중인 침묵. 무시하는 침묵.

지금 이것은 세 번째도, 첫 번째도 아니었다.

두 번째였다.

【이융】 그 물건은 무엇이냐.

이연은 잠시 굳었다.

【이연】 신탁을 전하는 기물입니다. 천상의 지식을 이 세계로 내리는 통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융】 …….

【이연】 직접 손을 대시면 안 됩니다. 이도(이연 자신)만 다룰 수 있습니다.

[이융의 목소리에 뭔가가 있었다. 이연은 그 '뭔가'가 마음에 걸렸다.]

【이융】 신탁. 그렇겠지.

믿는 것도, 안 믿는 것도 아닌 온도였다.

이연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인간은 의심하고 있다. 아직 확신이 없을 뿐이지.

한 달 동안 이연이 세종 행세를 해왔지만, 연산군은 그 4학기 대학원생의 거짓말을 완전히 믿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설득이 된 게 아니라, 그냥 아직 반박할 근거가 없어서 넘어가주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탁이 있는 한, 그 근거를 만드는 건 시간 문제였다.

이연은 노트북을 조용히 닫았다.

· · ·

배터리 43%.

이연은 탁자 위에 두 손을 얹고 잠시 앉아 있었다.

정리했다. 지금 상황:

이융은 의심하고 있다. 탁은 거짓말을 지원하지 않는다. 탁에게 접근하는 법을 이융이 알게 되는 순간, 거짓말은 끝난다. 탁이 사실대로 말할 것이고, 이연의 정체가 드러난다.

그 이후가 문제였다.

이융이 분노할 것이다. 같은 몸이니 물리적으로 어떻게 할 수는 없지만, 협력 관계가 완전히 무너진다. 이연이 갖고 있는 것은 미래 지식뿐이다. 이융이 갖고 있는 것은 이 몸, 이 왕권, 이 시대의 모든 네트워크다.

어느 쪽이 더 필요한지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즉, 발각되기 전에 이융에게 이 지식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발각되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

이연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딱. 딱딱.

캐릭터가 바뀌어서 조선에 온 건 아니었다. 이연은 여전히 계산부터 하는 사람이었다. 그 계산이 그를 이 자리까지 끌어왔고, 이 자리에서도 유일한 무기였다.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

딱딱딱딱.

[이연] 탁, 1495년 기준 조선의 재정 현황 요약해줘. 세입·세출 구조 중심으로. 왕이 직접 개입할 수 있는 항목이 뭔지도.

잠시 후 화면에 글자가 흘렀다.

[탁] 네. 조선 성종 재위 말기인 1494년 기준 호조 세입은…

이연은 처음으로 제대로 된 정보를 받기 시작했다.

조선이 어디 있는지, 이 나라가 뭘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창밖에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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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화: 이연, 처음으로 왕권을 쓰다 — 조선의 첫 번째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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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기 안내]
【이연】: 이연의 내면 목소리
【이융】: 연산군의 내면 목소리
[탁]: 노트북 화면 출력 (키보드 입력 시에만 등장)
딱·딱딱: 키보드 타이핑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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