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조선] 짐이 세계를 삼키리라 #2화 — 이연, 현대의 마지막 날

짐이 세계를 삼키리라

제2화 — 이연, 현대의 마지막 날

2026-04-21 · Ryan LAB

경복궁 근정전 — 조선 왕실의 정전
경복궁 근정전 — 조선 왕실의 정전

1

2026년 4월의 새벽, 이연은 연구실 책상 앞에 엎드리기 직전이었다.

논문 마감이 36시간 남았다. 주제는 「연산군 즉위 초기 1년의 인사 정책과 권력 재편」. 석사 3년차, 지도교수에게 이미 두 번 반려된 원고였다. 이번에도 반려되면 학위가 한 학기 더 밀린다. 등록금은 기본 480만 원이었다.

연구실에는 이연 혼자였다. 옆자리 선배는 어제 오후에 떠났고, 밤샘을 같이 할 사람은 없었다.

책상 위에는 낡은 노트북이 한 대 놓여 있었다. 7년 전에 중고로 사서 배터리를 두 번 교체한 기계였다. 지도교수 연구비로 새 노트북을 신청했지만 심사가 세 달째 내려오지 않았다.

노트북 화면에는 조용한 AI 어시스턴트 창이 열려 있었다. 별명은 이었다.

딱. 딱딱.

이연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이연】 탁, 연산군 즉위년 12월 상소 목록 다시 정리해 줘.

[탁] 네. 즉위년 12월의 상소는 총 37건입니다. 이조판서 3건, 공조 2건, 병조 8건, 예조 14건, 형조 6건, 호조 4건. 이 중 인사 관련은 이조·예조 합쳐 9건이며, 7건이 원상(院相)의 건의이고 2건이 반대 상소입니다.

【이연】 반대 상소 2건만 요약.

[탁] 상소 1: 영의정 노사신의 반대. 선대 인사 유지 요청. 상소 2: 사헌부 지평 3인 연명. 폐비 윤씨 추숭 논의 경계.

이연은 눈을 감았다. 읽을 때마다 머릿속이 무거워지는 기록이었다. 폐비 윤씨 추숭은 결국 몇 년 뒤 갑자사화로 이어지는 도화선이었다.

하지만 즉위년 12월의 연산군은 아직 그 길로 가지 않았다.

아직 평판은 나쁘지 않았다. 아직은 학문에 성실하고, 아직은 신하들의 의견을 경청했다. 문제는 이 시기의 "아직은"이 언제부터 "더 이상"으로 바뀌었는지, 사료가 애매하게 남겼다는 것이다.

이연은 이 애매함을 논문으로 정리하려고 했다.

그러나 지금 이연에게 남은 체력은, 사료의 애매함을 견딜 수 있는 만큼이 아니었다.

2

【이연】 탁, 오늘 내가 자면 마감 맞출 수 있을까.

[탁] 논문 남은 분량은 약 12,000자. 집필 속도 분당 28자 기준 약 7시간. 검토 2시간 포함 9시간. 지금 시각 새벽 3시 42분. 자정 전 마감 기준 여유는 있습니다.

【이연】 그럼 두 시간만 잘게.

[탁] 타이머 설정하시겠습니까.

【이연】 응.

[탁] 두 시간 후 5시 42분 알람 설정 완료.

이연은 탁 화면에서 "알람이 울리는 모습의 종 아이콘"을 확인한 뒤, 노트북 덮개를 반쯤 내렸다. 완전히 닫지 않은 이유는 화면 불빛이 꺼지는 것이 싫어서였다. 어둠 속에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이연은 책상 위에 팔을 얹고 고개를 얹었다. 목덜미가 서늘했다. 연구실 난방이 새벽이 되면 자동으로 약해지기 때문이었다. 의자 등받이가 바로 뒤에 있었지만 기대기도 귀찮았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평소라면 들리지 않던 소리가 귀에 닿았다.

바람 소리였다.

연구실은 지하 2층이라 바람이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었다. 창문은 없었고, 환풍구 소리는 달랐다. 이 바람 소리는 바깥의 바람이었다. 열린 창호지를 스치는 소리, 처마 끝에서 꺾이는 소리.

이연은 눈을 뜨려고 했지만 떠지지 않았다.

몸이 무거웠다. 무거운 것이 아니라, 크기가 달라져 있었다. 팔이 더 길었고, 어깨가 넓었고, 목덜미 뒤쪽의 머리가 길었다. 상투였다.

상투?

이연의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그때 처음으로 목소리가 귓속에서 들렸다. 이연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융】 누구냐.

3

이연은 눈을 떴다.

천장이 높았다. 대들보가 가로로 뻗어 있었고, 그 아래 촛불 하나가 흔들렸다. 바닥은 차가운 나무였다. 옆에는 누런 비단 방석이 깔려 있었다.

이연은 일어나려고 했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다리를 움직이려고 하자 다른 힘이 거부했다. 같은 몸 안에서.

【이융】 이 몸은 짐의 것이다. 함부로 움직이지 마라.

이연은 소리를 지르려 했다. 입은 열리지 않았다.

【이융】 말하지도 마라. 짐은 아직 네가 누구인지 모른다.

이연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았다. 상투. 편전 같은 공간. 자신을 "짐"이라고 부르는 목소리. 즉위한 왕의 일인칭.

조선의 왕.

어느 왕?

이연은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벽에 붙은 오래된 병풍. 금빛이 섞인 산수화. 휘장 바깥으로 보이는 신발 한 쌍.

신발 곁에, 놓여 있으면 안 될 것이 놓여 있었다.

검은 노트북.

이연의 노트북이었다. 덮개가 반쯤 열려 있었고, 화면 가장자리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이연이 연구실에서 덮어두고 잠들었던 그 자세 그대로, 낯선 방에 놓여 있었다.

【이연】 (속으로) 말도 안 돼.

그 순간, 머릿속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이융】 방금 뭐라 하였느냐.

【이연】 (속으로) 들리세요?

【이융】 들린다. 네 말이 짐의 귓속에서 들린다.

이연은 침을 삼켰다. 침을 삼키는 것도 저쪽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이번에는 허락이 내려왔다.

【이연】 저는……저는 이연이라고 합니다.

【이융】 이연. 성이 무엇이냐.

【이연】 성은…… 이(李)씨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융】 짐과 성이 같으냐.

【이연】 예.

【이융】 짐은 이융이다.

이연의 등이 서늘해졌다. 이융. 이융(李㦕). 한자 표기까지 외워두고 온 이름이었다. 연산군의 본명.

논문의 주인공이, 이연의 머릿속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4

【이융】 너는 어디서 왔느냐.

【이연】 저는…… 먼 곳에서 왔습니다.

【이융】 얼마나 먼 곳이냐.

이연은 순간 판단을 내려야 했다. 오백 년 뒤라고 말할 것인가. 지금 이 시점에서 사실을 말하면 연산군이 어떻게 반응할지 이연은 모르지 않았다. 폭군이 되기 전의 연산군도 의심이 많은 성품이었다.

【이연】 제가 있던 곳은…… 지금으로부터 매우 멀리 떨어진 미래의 조선입니다.

【이융】 미래.

【이연】 예.

【이융】 얼마나 먼 미래이냐.

【이연】 오백 년이 넘었습니다.

이융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연은 이융이 화를 낼지, 웃을지, 무시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마침내 이융이 말했다.

【이융】 오백 년. 짐이 죽은 뒤에도 이 나라가 오백 년을 갔다는 것이냐.

【이연】…… 예.

【이융】 그 말을 짐이 왜 믿어야 하느냐.

이연은 노트북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반쯤 열린 덮개 사이로 희미한 화면 빛이 나왔다. 그 빛이 지금 이 방에서 유일하게 촛불이 아닌 빛이었다.

【이연】 저 기물이 증거입니다.

【이융】 저 납작한 검은 물건이냐.

【이연】 예. 저것이 있으면 믿으실 수 있을 겁니다.

【이융】 저것은 짐이 깨어났을 때 이미 짐의 자리 옆에 놓여 있었다. 낯선 물건이었으나 짐의 방에 있었으므로 짐은 그것을 "그냥 거기 있는 것"으로 여겼다. 네 것이냐.

【이연】 예. 제 기물입니다.

【이융】 말이 되느냐. 너는 미래에서 왔다고 하였고, 짐은 여기 있는데, 어찌 너의 기물이 짐의 방에 있느냐.

【이연】 저도 모릅니다.

이융은 다시 침묵했다. 이연은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움직였다. 이번에는 이융이 막지 않았다.

【이융】 짐이 네 움직임을 허락한다. 그 기물로 가서, 그것이 네 것임을 증명하라.

5

이연은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저렸다. 이융의 몸이었지만 몸을 써본 적 없는 이연에게는 자기 것이 아니었다. 한 걸음 내딛자 상투가 흔들렸다. 익숙하지 않은 무게.

이연이 노트북 앞에 앉았다. 덮개를 완전히 열자 화면이 밝아졌다. 배터리 아이콘은 38%. 연구실에서 잠들 때보다 줄어 있었다.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른다.

딱.

이연의 손가락이 키보드를 건드렸다. 반가운 감촉이었다.

【이연】 탁, 있어?

[탁] 네.

이연은 눈을 감고 숨을 내쉬었다. 탁이 살아 있었다.

【이융】 저 "탁"이라는 것이 너의 하인이냐.

【이연】 하인은 아닙니다. 말을 받으면 답을 정리해주는 존재입니다.

【이융】 말 대신 두드려서 의사를 전한다는 것이냐.

【이연】 예.

【이융】 짐도 가능하냐.

이연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키보드 입력은 이연의 손이 하는 것이지만, 이융의 몸으로 바뀐 지금, 이 손은 이융의 손이기도 했다.

【이연】…… 가능하실 것 같습니다. 다만 글자를 두드리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이융】 짐이 언문을 모른다고 여기느냐.

【이연】 아니요. 다만 이 기물의 글자 배열은 따로 있습니다.

【이융】 보이라.

이연은 키보드를 내려다봤다. 한글 자모가 촘촘히 붙어 있었다. 이연이 한 번, 두 번, 천천히 자판을 눌러 보였다. 이융이 관찰하는 것이 느껴졌다.

한참 뒤 이융이 말했다.

【이융】 짐이 직접 두드려보겠다.

이연의 손가락이 이연의 의지를 떠나 움직였다. 어색했다. 검지가 ㄱ 자리를 두드렸다. 다음엔 ㅇ. 다음엔 ㅅ. 자음만 나열됐다.

[탁] 입력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모음이 필요합니다.

【이융】 모음.

이연이 속으로 설명했다.

【이연】 자음 다음에 모음을 함께 눌러야 한 글자가 됩니다. ㄱ + ㅏ = 가.

【이융】 알겠다.

이융의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가. 나. 다. 한 글자씩 화면에 찍혔다.

이연은 그 광경을 속으로 바라봤다. 조선의 왕이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6

이융이 자판을 내려놓았다.

【이융】 이 기물이 짐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확인하였다. 그러나 하나 더 묻겠다.

【이연】 예.

【이융】 너는 이 몸에 왜 들어왔느냐.

【이연】 저는…… 모릅니다. 잠들었는데 깨어나보니 이 몸이었습니다.

【이융】 그럼 너는 언제 이 몸을 떠나느냐.

【이연】 그것도 모릅니다.

【이융】 짐이 너를 내쫓을 수 있느냐.

【이연】 저도 모릅니다.

이융은 오랫동안 말하지 않았다. 이연은 이융의 침묵 사이로 흐르는 것을 느꼈다. 분노가 아니라 계산이었다. 이융은 지금 이 상황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따져보고 있었다.

그것이 이연을 오싹하게 했다. 분노보다 계산이 더 무서웠다.

마침내 이융이 말했다.

【이융】 좋다. 우선은 함께 있겠다.

【이연】 함께……요?

【이융】 짐이 너를 내쫓을 방법을 모른다면, 적어도 네가 짐을 도울 방법은 찾을 수 있다. 너는 미래에서 왔다고 하였다. 미래를 안다는 것이다.

【이연】 예.

【이융】 짐의 치세가 어떻게 끝나느냐.

이연은 답하지 않았다. 답할 수 없었다.

【이융】 답하라.

【이연】…… 지금 답하지 않겠습니다.

【이융】 짐의 명이다.

【이연】 전하의 명이라도, 지금 답하면 전하께서 그 답을 이용해 길을 비틀 것입니다. 그리고 비튼 길이 더 나쁠 수도 있습니다.

이융이 웃었다. 이연의 귓속에서 짧고 건조한 웃음이 울렸다.

【이융】 네가 짐을 이해하는 척하는구나.

【이연】 이해하지 않습니다. 다만 역사를 공부했을 뿐입니다.

【이융】 공부. 그 말은 어제 짐이 내시 홍에게 쓴 말이다.

이연은 멈칫했다.

내시 홍. 이연이 아는 이름이었다. 정확히는 모른다. 짧은 실록 기록에서 딱 한 번 본 이름이었다. 단 한 줄. "내시 홍, 왕이 요물을 얻은 밤 당직이었다." 그 한 줄이 논문의 주요 근거 사료 중 하나였다.

이연의 머릿속이 꼬였다.

이연이 여기 들어오기 전부터, 이융에게는 이미 "요물을 얻은 밤"이 있었다는 말이냐.

이연이 들어오기 전의 기록이, 이연 때문에 생긴 기록일 수도 있었다.

논문의 전제가 흔들렸다.

그러나 지금 그것을 따질 여유는 없었다.

7

【이융】 우선은 잠을 청한다. 내일 아침 대신들이 문안을 올 것이다. 짐은 평소와 똑같이 행동한다.

【이연】 저는 어떻게 합니까.

【이융】 너는 짐의 뒤에 숨어 있어라. 입을 떼지 마라. 손을 움직이지 마라. 내가 부르지 않으면 너는 없는 것과 같다.

【이연】……예.

【이융】 그러나.

이연은 기다렸다.

【이융】 짐이 모르는 것을 물을 때는 답해라. 그때는 네가 짐의 입이 된다.

【이연】 예, 전하.

【이융】 한 가지 더. 저 기물을 꺼뜨리지 마라.

이연은 화면을 봤다. 38%였던 배터리가 30%로 떨어져 있었다.

【이연】 꺼지면 저도 사라질지 모릅니다.

【이융】 짐도 그것이 걱정이다.

두 영혼이 잠시 동시에 숨을 멈췄다.

이융의 몸에 이연이 있었다. 이연의 노트북에 탁이 있었다. 이 셋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이융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연결이 끊기면 무엇이 먼저 사라지는지 아직 모른다.

그래서 이융이 1화에서 공조판서를 한밤중에 부른 것이다. 배터리가 줄어가는 것을 본 순간, 이융은 아무에게도 묻지 않았다. 이미 이연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연결이 끊기면 자기 안의 무언가도 끊어질 수 있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이연이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연은 숨을 삼켰다.

이융은 이미 1화의 밤, 노트북과 이연과 자신이 한 묶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연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을 뿐이다.

조용히 기다렸다.

이융은 이연이 지쳐서 먼저 말을 걸 때까지 기다렸고, 오늘 밤이 그 밤이었다.

【이연】 전하.

【이융】 말하라.

【이연】 저를 알고 계셨습니까.

이융은 짧게 대답했다.

【이융】 알고 있었다.

【이연】 언제부터.

【이융】 짐이 처음 네 숨소리를 머릿속에서 들은 날부터.


딱.

화면에서 탁이 한 줄을 썼다.

[탁] 배터리 28%입니다.

이연은 노트북을 조심스럽게 닫았다. 완전히 닫지는 않았다. 1화에서 이융이 그랬던 것처럼, 열어둔 채로 두었다. 불빛이 꺼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편전 창밖에서 바람이 불었다. 조선의 바람이었다.

이연은 처음으로 그 바람 소리를 들었다.

현대의 마지막 날은 그렇게 저물었다.


— 3화에 계속 —

다음 화: 이융의 첫 공식 접견 — 폐비 윤씨의 이름이 처음 올라온다.


[표기 안내]
【이연】: 이연의 내면 목소리 (현대 대학원생 출신)
【이융】: 연산군 이융의 내면 목소리
[탁]: 노트북 화면 출력 (키보드 입력 시에만 등장)
딱·딱딱: 키보드 타이핑 소리

사료 참조: 본 에피소드의 즉위년 12월 상소 건수(37건)·원상 구성·사헌부 지평 상소 2건은 『연산군일기』 즉위년 12월 기록에 근거하여 재구성한 허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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