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조선] 2화 — 이연, 현대의 마지막 날
짐이 세계를 삼키리라
제02화 — 이연, 현대의 마지막 날
2026-04-10 · Ryan LAB
서울. 2026년 3월 어느 날.
역사학과 대학원 연구실. 새벽 1시.
형광등 하나가 간헐적으로 깜빡였다. 이연은 그 불빛 아래 턱을 괴고 앉아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논문 초고가 세 뭉치, 컵라면 용기가 두 개, 그리고 이미 식은 캔커피 하나.
이연(李鋆), 28세. 조선사 전공, 석사 4학기. 지도교수 눈 밖에 난 지는 오래됐다.
논문 제목: 「연산군(燕山君) 재위기 왕권 강화 기제 연구 — 중종반정 이전 정치 구조를 중심으로」
처음 이 주제를 잡았을 때 지도교수가 물었다.
"연산군을 굳이 왜?"
이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됐을 수도 있었는데 망한 케이스라서요."
지도교수가 안경 너머로 이연을 바라봤다.
"논문 주제를 정하는 데 그 이유로 정하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칭찬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이연은 그냥 넘어갔다.
연산군. 조선 제10대 왕. 재위 12년. 폭군의 대명사.
그런데 숫자를 들여다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즉위 초반 2년, 연산군의 치세는 나쁘지 않았다. 세금은 전 왕대보다 낮았고, 외교 기록에는 주변국이 조선을 안정적으로 봤다는 흔적이 남아 있었다. 왕권 장악 속도도 꽤 빨랐다. 기록만 보면, 이 사람은 뭔가 될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완전히 무너졌다.
계기가 뭐였느냐에 대해서는 논문도 많고 주장도 많았다. 생모 폐비 윤씨의 죽음이라는 쪽이 가장 많았다. 그 사실을 알고 난 뒤 연산군이 돌변했다는 거다. 갑자사화, 무오사화. 피바람.
이연은 그 흐름이 언제 봐도 아까웠다.
'계기가 하나만 달랐어도.'
그 생각 하나가 4학기 동안 이연을 이 주제에 묶어뒀다.
딸깍.
저장 버튼을 눌렀다.
새벽 1시 22분. 노트북 화면에 마지막으로 수정한 결론 챕터가 펼쳐져 있었다. 아직 빈 곳이 많았다. 내일 아침 9시 제출 마감. 지금 집에 가서 자고 일어나면 딱 맞게 돌아갔다.
이연은 가방에 노트북을 쑤셔 넣었다.
연구실 불을 껐다. 복도가 어두웠다. 새벽 대학은 조용하다 못해 텅 빈 느낌이었다. 비상구 표시등 불빛만 초록빛으로 복도를 물들이고 있었다.
건물 밖으로 나오니 3월의 찬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이연은 목을 움츠리고 이어폰을 꽂았다. 지하철역까지 7분. 오늘은 노래 대신 그냥 조용하게 걷고 싶었다.
이어폰을 꽂았는데도 음악을 틀지 않았다.
머릿속은 여전히 연산군으로 가득했다.
1495년 1월. 즉위 한 달 차. 아직 아무것도 터지기 전. 이연이 논문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파고든 시기. 이 시점의 연산군은 신하들을 다루는 방식이 꽤 영리했다. 직접 치지 않고, 구도를 만들었다. 신하들이 서로를 견제하게 놔두면서 왕이 중심에 섰다.
그 감각이, 이연은 솔직히 탐났다.
역사학과에 온 이유가 그거였다. 과거의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어떻게 움직였는지. 그것이 지금과 뭐가 다르고 뭐가 같은지.
연산군은 그 중에서도 특이한 케이스였다. 너무 빨리 올라갔다가, 너무 처참하게 망했다.
'한 번만 들여다볼 수 있으면.'
횡단보도 앞에 섰다.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었다.
이연은 이어폰을 고쳐 꽂으면서 발을 내디뎠다.
그 다음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눈을 떴다.
첫 번째로 느낀 건 냄새였다.
나무. 흙. 그리고 뭔가 연기 같은 것. 향이라기엔 무겁고, 공기라기엔 두꺼웠다.
천장이 높았다.
목조 기둥이 어둠 속에서 윤곽을 드러냈다. 들보가 여러 개 가로질러 있었다. 그 위로 기와가 얹혀 있을 것이었다. 창문 너머로 달빛이 비스듬히 들어왔다. 비단처럼 고운 천이 사방에 늘어져 있었고, 바닥에는 자리가 깔려 있었다.
이연은 잠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꿈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눈앞에 가져왔다.
손이었다.
손인 건 맞는데, 이 손이 자기 손 같지 않았다. 살갗이 달랐다. 손가락 마디가 달랐다. 뭔가 더 두텁고, 더 거칠었다. 이연의 손은 논문 탓에 항상 건조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전신에 무게감이 달랐다. 단순히 다른 곳에 누워있어서가 아니라, 몸 자체가 달랐다. 이연이 알던 자기 몸의 균형이 아니었다.
눈이 어둠에 적응되면서 방 안이 보이기 시작했다.
황금빛 자수가 놓인 병풍. 옻칠을 한 상. 은촉대에 꽂힌 초. 정교하게 짜인 나전 문양.
역사학과에서 4년을 공부한 이연의 뇌가 빠르게 분류했다.
조선. 상류층 이상. 아니, 그 이상. 왕실.
그리고 탁자 위에—
노트북이 있었다.
이연은 자신의 노트북을 알아봤다.
긁힌 자국이 세 개 있는, 검은색 덮개. 충전 단자 부분이 조금 뜯겨 있는 그 노트북이었다. 덮개가 반쯤 열려 있었고, 화면에서 빛이 흘렀다. 낮은 밝기로 설정된 화면이 방 안을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다.
1495년 조선 왕실 처소 한가운데, 21세기 노트북이 있었다.
이연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상황 정리. 지금 당장.
몸이 다르다 → 다른 사람의 몸. 이 공간은 조선 왕실 수준의 처소. 노트북이 자기 것이다. 즉, 자신은 어떤 식으로든 이 공간으로 넘어왔다.
그리고 이 시대, 이 공간, 이 처소의 수준에서 거주하는 인물은.
이연은 병풍을 다시 봤다. 금색 봉황 문양. 오조룡. 왕실 전용 문양이었다.
'설마.'
그 생각이 채 끝나기 전에, 머릿속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건조한 목소리였다.
【이융】 네가 누구이냐.
밖에서 오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안에서 왔다. 정확히는, 이 몸 안에서.
이연은 멈췄다.
빠르게 계산했다. 같은 몸이다. 이 목소리는 이 몸의 원래 주인이다. 1495년, 조선 왕실. 이 몸의 주인.
논문 주제.
이연은 입을 열었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이연】 …짐은 이도(李裪)이니라.
세종대왕. 조선 제4대 왕. 훈민정음 창제. 장영실. 4군 6진.
연산군의 5대조.
연산군의 몸에 들어온 이연이 가장 먼저 뱉은 말이었다. 역사학 대학원 4학기의 지식이 공황 상태 한복판에서 내놓은 최초의 선택.
첫 번째 거짓말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융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융】 이도.
단어 하나였다. 그 단어 안에 뭔가가 잔뜩 들어 있었다. 믿음도 아니고, 불신도 아닌. 뭔가를 재는 것 같은 온도였다. 연산군이 신하들을 다룰 때 쓰는 것과 비슷한 온도. 이연은 4년 치 논문 읽기를 통해 그 온도를 알고 있었다.
'이 사람은 지금 나를 재고 있다.'
이연은 속으로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세종이라고 했다. 세종이면 연산군에게는 5대조다.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으로 이어지는 혈통의 시작점. 그 시대 사람들에게 세종은 이미 신화였다. 성군. 훈민정음. 측우기. 4군 6진. 집현전. 나라를 가장 잘 다스렸다고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왕.
설득력을 만들려면 두 가지가 필요했다. 하나는 세종에 대한 지식. 하나는 이 시대의 예법.
지식은 있었다. 석사 논문은 연산군이었지만, 조선 전기 왕권 구조 전체를 잡으려면 세종대의 기틀부터 분석해야 했다. 세종실록은 조선 왕 중 가장 방대한 실록 중 하나다. 이연은 그것을 꽤 읽었다.
문제는 예법이었다.
이연은 말투와 행동에서 조선식 격식을 얼마나 지킬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논문에는 안 나오는 것들이다. 왕이 앉는 방식. 신하를 부르는 방식. 의례. 절차. 이 몸이 이미 알고 있으면 다행이었다. 몸의 기억이란 것이 있으니까.
다행히, 아니면 불행히도, 이 몸은 이미 그것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현대 역사학 대학원생의 지식과 1495년 연산군의 몸이 결합된 기묘한 상태.
이연은 그 상태에서 두 번째 말을 고르고 있었다.
【이연】 (속으로) 탁자 위에 그 물건부터 확인해야 한다—
그때 화면에서 빛이 흘렀다.
노트북 화면에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이 시대에서, 이 몸으로. 기다리고 있다는 듯이.
다음 화: 이연, 처음으로 탁에게 말을 걸다
【이연】: 이연의 내면 목소리
【이융】: 연산군의 내면 목소리
[탁]: 노트북 화면 출력 (키보드 입력 시에만 등장)
딱·딱딱: 키보드 타이핑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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