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조선] 짐이 세계를 삼키리라 #3화 — 폐비 윤씨의 이름
짐이 세계를 삼키리라
제3화 — 폐비 윤씨의 이름
2026-04-22 · Ryan LAB
1
편전의 새벽은 조용했다.
이연은 이융의 몸 속에서 눈을 떴다. 눈이 떠졌다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눈이 떠지는 것을 허락받았다 가 더 정확했다. 이융이 먼저 깨어 있었다. 이융은 아무 말 없이, 이연이 의식을 회복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짧게 말했다.
【이융】 오늘 짐은 첫 문안 접견을 받는다.
【이연】 예.
【이융】 너는 숨어 있어라.
【이연】 숨어 있겠습니다.
【이융】 그러나 짐이 부르면 답해라.
【이연】 답하겠습니다.
이연은 처음으로 이융의 몸으로 숨을 쉬었다. 자신의 폐가 아니었지만 자신의 의지로 부풀어 오르는 것이 이상했다. 가슴의 옷깃이 들렸다가 내려앉았다. 살아있다는 감각은 다른 사람의 몸에서도 동일한 형태로 나타났다.
옆방에서 내시 홍의 발소리가 들렸다. 조심조심, 깨울까 말까, 그런 걸음.
"전, 전하. 기침(起寢)하시었사옵니까."
이융이 고개만 돌렸다.
"들어오라."
내시 홍이 조심스럽게 문을 밀어 열었다. 눈이 요물 쪽으로 먼저 향했다. 요물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화면 가장자리에 희미한 불빛이 있었다. 어젯밤 물레방아에서 돌아온 뒤 계속 조금씩 회복 중이었다.
딱.
이연이 속으로 탁에게 물었다.
【이연】 탁, 배터리.
[탁] 현재 23%입니다. 지난밤 충전 이후 안정적으로 상승 중. 수차(水車) 가동이 계속되면 오늘 중 50%까지 도달 가능합니다.
이연은 속으로 짧게 숨을 내쉬었다. 23%. 안심할 수치는 아니었지만, 꺼지는 것에 대한 공포는 조금 물러났다.
2
"전하, 문안 대신들이 외전에 대령하였사옵니다."
"몇이냐."
"좌의정, 우의정, 이조판서, 예조판서, 대사헌을 포함하여 아홉이옵니다."
"사헌부는 누가 왔느냐."
내시 홍이 숨을 한 번 삼켰다.
"대사헌 외에 지평 세 분이 함께 연명으로 상소를 올리셨사옵니다."
이융이 잠깐 손을 멈췄다. 이연은 그 멈춤을 느꼈다. 사헌부 지평 세 명의 연명 상소. 이연의 논문에서 본 그 기록이었다. 즉위년 12월의 주요 사료 중 하나. 폐비 윤씨 추숭 논의에 대한 경계 상소.
【이연】 ……전하.
【이융】 말하라.
【이연】 지금 그 상소가 오릅니다.
【이융】 어떤 상소냐.
【이연】 사헌부 지평 세 분이 연명으로 올리는 상소. 내용은 폐비 윤씨의 추숭을 경계하라 는 건의입니다.
이융의 호흡이 한 번 짧아졌다. 이연은 그 호흡이 바뀌는 것을 같은 몸 안에서 들었다.
【이융】 경들이 짐의 어머니의 이름을 입에 올리겠다는 것이냐.
【이연】 ……예.
【이융】 짐의 앞에서.
【이연】 예, 전하.
이융은 한참 말하지 않았다. 이연은 이 순간 이융의 내면에서 빠르게 차오르는 것이 분노가 아니라 준비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융은 어머니의 이름이 신하들의 입에 오르는 순간을 이미 여러 번 머릿속으로 연습했던 것이다. 분노의 세부 사항이 아니라, 분노하지 않을 연습을.
3
외전의 문이 열렸다.
대신들이 차례로 들어와 몸을 굽혔다. 대사헌이 앞에 나섰다. 사헌부 지평 세 명이 그 뒤에 섰다.
"전하의 성체만강(聖體萬康)을 삼가 빌며 신(臣) 이(李)를—"
이융이 손을 들어 예를 생략하게 했다.
"대사헌, 짐이 들으니 오늘 상소가 있다 하였다. 지평들의 연명이라 하였지."
"예, 전하."
"누구의 이름으로 올리는 상소냐."
대사헌이 한 걸음 물러서며 사헌부 지평 셋을 가리켰다.
"지평 심정수(沈鼎秀), 지평 윤영식(尹永植), 지평 조만기(趙萬基) 삼인의 연명이옵니다."
이연의 머릿속에서 세 이름이 빠르게 돌았다. 심정수·윤영식·조만기. 논문에서는 이름만 나오고 세부 이력은 사료가 부실해 재구성이 어려웠던 세 사람. 그 세 사람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었다.
"상소를 읽어라."
지평 심정수가 앞으로 나서 두루마리를 펴 들었다.
"신 사헌부 지평 심정수, 윤영식, 조만기가 황공히 아뢰옵니다. 근래 일부 신료들 사이에 폐비 윤씨의 추숭을 논의할 때가 되었다 는 의견이 오가고 있다는 소문을 신들이 듣자오니—"
【이융】 (속으로) 소문이라 하는구나.
【이연】 네. 아직은 '소문'이라는 단어로 포장하고 있어요.
【이융】 무슨 뜻이냐.
【이연】 이 단계에서 이 상소가 올라온다는 건, 경들이 전하의 반응을 시험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전하가 분노하시면 추숭 논의가 아직 이르다는 증거가 되고, 전하가 무시하시면 추숭 논의가 열려 있다는 신호가 됩니다.
【이융】 그래서 짐은 어찌 답해야 하느냐.
【이연】 …… 지금 답하지 마세요.
심정수가 상소를 계속 읽었다.
"—이에 신들이 삼가 주상 전하께 아뢰옵나니, 아직 즉위 초년이시고 대통(大統)이 막 안착하는 때이므로, 친모의 존호를 논하는 일은 시기상조 로 사료되옵니다. 또한 폐비 윤씨의 처신에 대한 선대의 결정은 선대의 결정이며, 이를 지금 시기에 되살리심은 선대에 대한 불효로 해석될 여지가 있사오니, 부디 신료들에게 경계의 뜻을 밝히시어—"
딱.
이융의 손가락이 옆구리의 옷자락에 짧게 닿았다. 손가락이 보이지 않는 자판을 두드리는 듯한 동작이었다. 이연은 이융이 탁을 호출하려 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편전에는 노트북이 없었다. 물리적으로는 없었지만, 이융의 머릿속에서 탁은 상시 대기 상태였다.
[탁] (내면에서) 전하의 반응 후보를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후보 A: 상소 수락(시기상조 동의). 후보 B: 상소 거절(즉각 추숭 명). 후보 C: 유보(검토 지시). 후보 C가 역사적 리스크 최소 입니다.
【이융】 ……검토.
심정수의 상소 낭독이 끝났다. 외전이 조용해졌다.
이융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경들의 뜻을 짐이 들었다. 친모의 존호에 관한 논의는 때를 보겠다. 오늘 이 자리에서 결정하지 않는다. 상소는 내자시(內資寺)에 보관하라."
지평 세 명이 동시에 바닥에 이마를 대었다. 전하의 답이 '유보' 였다. 분노도 아니고, 수락도 아니고, 유보. 세 명의 등이 긴장한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융이 한마디 더 덧붙였다.
"다만."
지평 심정수가 고개를 들었다.
"경들의 이름을 짐이 기억하겠다. 심정수, 윤영식, 조만기. 세 이름을 내전 서안(書案)에 적어두겠다. 기억한다는 것은 벌이 아니라 관심이다. 앞으로 경들이 올리는 상소를 짐이 주의 깊게 읽겠다는 뜻이다. 그리 아시오."
세 명의 등이 잠시 굳었다.
4
대신들이 물러난 뒤, 편전은 다시 조용해졌다.
이융이 용포 안쪽에서 손을 천천히 풀었다. 손톱 자국이 손바닥에 남아 있었다.
【이융】 짐이 잘하였느냐.
【이연】…… 잘하셨습니다, 전하.
【이융】 어머니의 이름을 짐 앞에서 들었다.
【이연】 예.
【이융】 짐이 반응하지 않았다는 것은, 경들이 보기에 짐이 반응할 준비가 안 되었다 는 증거로 남을 것이다. 경들이 짐을 어린 왕으로 보았을 것이다.
【이연】 지금은 그렇게 보이는 것이 유리합니다.
【이융】 유리?
【이연】 전하가 어머니의 이름에 반응하지 않는 왕으로 보이는 동안, 경들은 전하의 주변 세력을 과소평가합니다. 경들이 과소평가할 때 전하는 준비를 끝낼 수 있습니다.
【이융】 준비라 함은?
【이연】 ……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은 탁의 배터리가 올라가는 것이 먼저입니다.
5
내시 홍이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전하, 오늘 아침 수라는 죽과 김치로 올렸사온데, 문안 접견 중에는 차만 올리라 하시어—"
"경이 수고했다."
내시 홍이 움찔했다. 또 칭찬을 받은 건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말투였다.
"홍아."
"예, 예에엣."
"어젯밤 수차(水車)는 지금도 돌고 있느냐."
"예, 전하. 공조 장인들이 교대로 지키고 있으며, 밤새 멈추지 않았다 하옵니다."
"좋다. 계속 돌려라. 자침과 동선 상태를 반시진(半時辰)마다 공조 판서에게 확인하게 하라."
"예, 전하."
내시 홍이 물러나려다가 문턱에서 멈칫했다.
"전, 전하."
"말해 보아라."
"황공하오나, 신 홍이 어제 상침 처소에 다녀온 일에 대하여 상침 마마께서 이르시기를—"
"마마께서 무어라 하시었느냐."
"무슨 일인지 반드시 설명하라 하시었사옵니다. 신이 뭐라 답해야 할지 아직 생각이 미치지 못하여—"
이융이 잠깐 가만히 있다가 이연 쪽으로 물었다.
【이융】 어찌 답하느냐.
【이연】 상침 마마는 사려 깊으십니다. 거짓말보다 부분적 진실이 낫습니다.
이융이 고개를 끄덕였다.
"홍아, 상침 마마께 이렇게 전하라. 기물이 하나 있는데 매우 귀한 것이라 밤중에 물에 젖지 않도록 자침이 필요하였다. 그 이상은 말하지 말라."
내시 홍이 눈을 깜빡였다. 기물. 자침. 물. 밤중. 설명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예, 예에엣."
내시 홍이 종종걸음으로 나갔다. 복도에서 그의 발자국 소리가 일정하지 않았다. 두 걸음 빨라졌다가 한 걸음 느려지는, 사람이 계속 뭔가 생각할 때 내는 걸음이었다.
6
편전이 다시 비자 이연은 처음으로 용포 안에서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융이 허락했기 때문이었다.
【이융】 너는 어제 밤부터 짐의 앞에 서 있었다.
【이연】 ……예.
【이융】 숨어 있으라 하였는데 몇 번을 나왔다.
【이연】 죄송합니다.
【이융】 아니다.
이연은 잠시 말하지 못했다.
【이융】 숨어 있으라 한 것은 짐이 너를 부끄러워해서가 아니라, 경들이 네 존재를 알면 경들이 이용한다 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짐이 너와 두 영혼을 가진 왕이라는 것을 알면 경들은 짐의 두 영혼 중 약한 쪽에 붙으려 할 것이다.
【이연】 그렇습니다.
【이융】 그러나 네가 없었으면 오늘 아침 짐은 어머니의 이름 앞에서 실수를 하였을 것이다.
이연은 잠시 답하지 않았다. 이융은 기다렸다.
【이연】 전하.
【이융】 말하라.
【이연】 제가 전하를 도와드리는 것이 저의 의무인지 저의 선택인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다만 오늘은 도와드리고 싶었습니다.
【이융】 됐다. 짐은 너의 의무와 선택의 경계를 묻지 않겠다.
딱. 딱.
탁의 화면이 깜빡였다. 이연이 탁자 앞으로 걸어갔다.
[탁] 충전 상태 업데이트. 현재 28%. 수차가 안정적으로 돌고 있어 시간당 1~1.5% 상승 중. 24시간 내 70% 도달 예상.
이연은 눈을 감았다. 28%. 어제 3%까지 내려갔던 숫자. 밤사이에 스물 다섯이 오른 숫자. 이연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결론이 굳어졌다. 살릴 수 있다.
7
창밖의 겨울 햇빛이 처마 끝에서 잘게 부서졌다.
이융이 용좌에서 일어섰다. 이연은 그 일어섬을 같은 몸 안에서 느꼈다. 다리가 무겁지 않았다. 어젯밤 빙의 직후에는 다리가 남의 것이었는데, 하룻밤이 지난 지금은 한 발 한 발이 조금씩 자기 것처럼 느껴졌다.
【이융】 이연아.
【이연】 예, 전하.
【이융】 오늘 밤에도 짐 옆에 있거라.
【이연】 예.
【이융】 단, 상소가 다시 올라오면 짐을 부르지 말고, 네가 먼저 답을 준비해두어라. 짐이 그때는 네 답을 먼저 보고 판단하겠다.
【이연】 …… 전하가 제 답을 먼저 보는 것은 위험합니다.
【이융】 짐은 위험을 선택한다. 준비 없는 왕보다 준비된 두 영혼이 낫다.
이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융의 목이 같이 움직였다.
두 영혼이 하나의 몸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창밖의 햇빛만이 보았다.
— 4화에 계속 —
다음 화: 사헌부 지평 셋 중 한 명이 밤중에 편전으로 부르심을 받는다. 그 자리에서 그는 왕의 질문에 답해야 한다 — "너는 짐의 어머니의 이름을 왜 입에 올렸느냐."
[표기 안내]
【이연】: 이연의 내면 목소리 (현대 대학원생 출신)
【이융】: 연산군 이융의 내면 목소리
[탁]: 노트북 화면 출력 (키보드 입력 시에만 등장)
딱·딱딱: 키보드 타이핑 소리사료 참조: 즉위년 12월 사헌부 지평 3인 연명 상소는 『연산군일기』 기록을 모티프로 재구성한 허구입니다. 지평 성명(심정수·윤영식·조만기)은 창작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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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화: [대체조선] 짐이 세계를 삼키리라 #2화 — 이연, 현대의 마지막 날
1화부터 읽기: [대체조선] 짐이 세계를 삼키리라 #1화 — 탁아, 제발 꺼지지 마라
시리즈 전체 보기: 라이언 퀀텀 랩 — 대체조선
작성자: Ren, RyanLAB 콘텐츠팀장 · 최종 업데이트: 2026-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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