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조선] 짐이 세계를 삼키리라 #4화 — 이융이 잠든 밤
짐이 세계를 삼키리라
제04화 — 이융이 잠든 밤
2026-04-24 · Ryan LAB
편전의 새벽은 느리게 밝아 왔다.
이연은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바로 앞에는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화면은 희미하게 빛을 냈고, 아래쪽에 작은 번개 모양과 함께 숫자가 하나 떠 있었다.
32%.
이연은 그 숫자를 오래 바라봤다. 물레방아 발전기를 돌린 지 사흘째 밤이었다. 사흘 내내 자침이 휘감긴 축이 돌았고, 즉석 변환선을 통해 조금씩 충전량이 올라갔다. 15%, 17%, 20%, 24%, 28%. 그리고 어젯밤 32%에서 멈췄다.
그 이상이 올라가지 않았다.
【이연】 탁, 왜 32에서 안 올라가?
[탁] 즉석 변환선의 저항이 과열되어 잠시 차단된 상태입니다. 식으면 다시 올라갑니다. 다만 효율이 낮아, 하루에 3~4%가 한계입니다.
【이연】 하루에 3~4%.
[탁] 정확히는 장인이 24시간 연속 축을 유지할 때입니다. 현실적으로는 1~2% 수준일 것입니다.
딱.
이연은 손가락을 멈췄다.
배터리가 꺼지지 않을 수준으로는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탁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 하루에 한 시간 정도 검색, 두 시간 정도 대화. 그게 한계였다.
이연은 노트북을 조금 기울였다. 화면이 옅게 흔들렸다.
그리고 창밖을 봤다.
내시 홍이 문 밖에서 조심스럽게 기침을 했다.
"에헴, 전, 전하. 새벽 수라를 올리오리이까."
이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뒤에야 고개를 돌렸다.
"홍아."
"예, 예에엣."
"오늘은 따로 국 하나만 올리거라."
"예? 죽도 올리지 마오리이까?"
"됐다."
내시 홍은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절하고 물러갔다. 내시 홍의 등이 사라진 뒤, 이연은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사실은 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
어젯밤 이융이 폐비 윤씨의 이름을 들은 이후로, 이융은 깊이 물러가 있었다.
이연의 머릿속 한쪽 끝, 이융이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비어 있는 건 아니었다. 이융은 그곳에 있었다. 다만 잠들어 있었다. 이연이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융은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연】 전하.
침묵.
【이연】 전하, 주무세요?
침묵.
【이연】 ……전하.
이연은 이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역사학 대학원에서 논문을 쓰던 시절, 이연은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이름을 듣고 보인 반응에 대해 여러 사료를 읽었다. 실록의 기록, 야사의 기록, 후대 학자의 해석. 그 모든 기록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충격은 즉시 오지 않는다. 하루나 이틀, 길면 사흘이 걸려 돌아온다.
그리고 돌아왔을 때,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폐비 윤씨 이름을 처음 듣고 난 직후의 연산군은 괜찮아 보였다. 다음 날에도 괜찮아 보였다. 그 다음 날에 사람들이 죽기 시작했다.
이연은 오늘이 그 '다음 날'이 되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러려면 이융이 깨어나기 전에 오늘 하루를 어떻게든 넘겨야 했다.
딱. 딱딱.
이연은 화면을 두드렸다.
【이연】 탁, 오늘 편전에 올라올 상소 목록 예상해봐.
[탁] 본 세계에서는 예상이 어렵습니다. 다만 기록상 이 시기에 반복적으로 올라온 주제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사헌부의 외척 견제 상소. 둘째, 사관(史官) 기록의 독립성 문제. 셋째, 함길도 변경의 여진족 동향입니다.
【이연】 사관 기록 독립성.
[탁] 예. 이 시기에 김종직 문하의 사림(士林) 계열 사관들이 조금씩 조정에 진출하는 중입니다. 그들의 기록 중 일부가 훗날 무오사화(戊午士禍)의 근거가 됩니다.
딱.
이연은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무오사화. 그 이름만으로 이연의 손이 차가워졌다.
1498년. 지금으로부터 약 삼 년 뒤. 김일손이 사초에 적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문제가 되어 수많은 사림이 죽는다. 당시의 왕은 연산군. 즉, 지금 이연의 몸을 함께 쓰고 있는 이융이었다.
역사에서는 이융이 사관을 죽였다.
그러나 지금 이융은 잠들어 있었다.
【이연】 탁, 오늘 올라올 상소 중에 사관 문제가 있으면 어떻게 답해야 해.
[탁] 역사적으로 최선의 방어는 '사초(史草)를 왕이 보지 않는다'는 관례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사관의 기록에 왕이 개입하는 순간, 역사는 왕의 입맛에 맞게 편집되고, 편집된 역사는 훗날 반드시 뒤집힙니다. 이는 수많은 왕조가 반복한 실패입니다.
【이연】 알아.
[탁] 따라서 어떤 사관이 어떤 내용을 적더라도, 왕이 직접 사초를 열람하거나 검열하지 않는 태도가 가장 안전합니다. 이 원칙은 훗날 '조의제문 사건'의 예방에도 직결됩니다.
【이연】 그래. 그게 핵심이야.
이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이융이 잠들어 있다는 점이었다. 편전에 신하가 올라와 상소를 올리면, 대답은 이연이 해야 한다. 이연이 이융의 목소리와 말투를 흉내내며 답해야 한다.
그런데 흉내만으로는 이융의 결단이 나오지 않는다. 이융은 열 번 중 한두 번은 분노하고, 대여섯 번은 냉정하고, 두세 번은 웃었다. 이연은 이 중에서 어떤 이융을 연기해야 할지 매번 판단해야 했다. 혼자서.
이연은 탁을 바라봤다.
탁의 배터리는 32%에서 차갑게 멈춰 있었다.
사시(巳時). 편전.
신하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이연은 용상에 앉아 있었다. 어깨를 곧게 펴고, 턱을 살짝 당기고, 눈빛을 가라앉혔다. 이융의 자세였다.
가장 앞에 선 신하가 꿇어 앉았다. 사헌부 지평(持平) 김일손이었다.
이연의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김일손.
삼 년 뒤 죽는 사람. 바로 그 사람.
"전하, 신 김일손, 사헌부 지평의 자격으로 아뢰옵니다. 사초(史草)의 기록 관련하여 신이 경계하여 올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이연은 턱을 살짝 움직였다. 말을 받으라는 표시였다.
"전하, 근자에 편전의 일을 사관이 기록함에 있어 일부 신하들이 그 내용을 미리 알고자 하는 일이 있사옵니다. 사초의 기록은 왕도 보지 않는 것이 조종(祖宗)의 법이오며, 신하 또한 이를 보아서는 아니 될 것이옵니다. 신이 이를 무겁게 여겨 감히 전하께 아뢰옵나이다."
이연은 잠시 침묵했다.
편전 안이 고요해졌다. 신하들이 왕의 입을 바라봤다. 이 순간, 왕이 "그럼 짐은 사초를 볼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훗날 사화의 씨앗이 된다. 이연은 그 질문을 절대 해선 안 됐다.
절대.
이연은 입을 열었다.
"경의 말이 옳다."
짧았다. 이융이라면 더 길게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연 혼자였다. 짧게 끝내야 안전했다.
"사초는 왕도 신하도 보지 않는 것이 조종의 법이다. 경이 이를 상기시킴은 가상하다. 앞으로도 사관은 그 직무의 독립성을 지켜야 할 것이다. 누구든 사초에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지평의 직권으로 이를 막으라."
김일손이 이마를 땅에 댔다.
"전하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연은 속으로 한 번 숨을 내쉬었다.
무오사화의 씨앗 하나가 오늘 꺼졌다. 물론 단 하나였다. 1498년까지 수많은 다른 씨앗들이 자랄 것이다. 이연은 그것들을 하나씩 꺼야 할 것이었다. 삼 년에 걸쳐서. 이융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깨어나 있는 동안에도.
신(申)시. 신하들이 물러간 편전.
이연은 그제야 용상에서 내려왔다. 다리가 저려 한 걸음 휘청였다.
내시 홍이 놀라 달려왔다.
"전, 전하, 괜찮으시옵니까!"
"됐다."
"하, 하지만—"
"홍아, 노트북을 내 방으로 옮겨라. 조심히."
"예, 예에엣."
내시 홍이 노트북을 두 손으로 받들어 옮기기 시작했다. 노트북에서 빛이 살짝 새어 나왔다. 내시 홍은 그 빛을 볼 때마다 여전히 손이 떨렸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달랐다.
이 빛이 없으면 왕이 더 힘들어지신다.
내시 홍은 사흘 전 밤, 마당의 물레방아 앞에서 왕의 얼굴이 얼마나 굳어 있었는지를 기억했다. 그리고 지금 왕의 어깨가 얼마나 내려와 있는지도 봤다. 내시 홍은 영문은 모르되, 이 빛이 왕의 어깨를 지탱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다.
내시 홍은 노트북을 조심조심 옮기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요물아, 네가 뭐든 간에, 꺼지지만 마라.'
내전. 깊은 밤.
이연은 다시 탁자 앞에 앉았다.
【이연】 탁, 오늘 몇 % 썼어.
[탁] 오늘 18% 사용했습니다. 현재 14% 남았습니다.
【이연】 …….
사흘을 버틴 32%가 오늘 하루 만에 18% 사라졌다. 편전에서 이연이 탁에게 끊임없이 조언을 구한 탓이었다. 사관 문제, 외척 문제, 변경 문제. 세 상소가 올라왔고, 세 번 모두 이연은 탁에게 의지했다.
탁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이융의 역할을 연기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속도로 가면 내일이면 탁은 다시 10% 아래로 떨어진다. 물레방아 발전은 하루 3~4%가 한계였다.
이연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연】 ……전하.
침묵.
【이연】 전하, 주무세요?
잠시 뒤.
【이융】 …….
아주 희미하게. 그러나 처음으로. 반응이 있었다.
【이연】 전하!
【이융】 ……이연아.
【이연】 주무셨어요?
【이융】 꿈을 꾸었다.
【이연】 …….
【이융】 어미의 꿈이었다.
이연은 숨을 멈췄다.
이융은 한참 뒤에야 다시 말을 이었다.
【이융】 어미가 사약을 받던 장면을 꿈에서 보았다. 내가 본 적이 없는 장면이었는데, 꿈속에서 아주 선명했다. 어미가 마지막에 피 묻은 수건을 던지며 이 아이에게 전하라고 했다는 이야기. 그 이야기가 꿈에서 사실처럼 눈앞에서 일어났다.
【이연】 …….
【이융】 이연아.
【이연】 예, 전하.
【이융】 나는 지금 네 힘을 빌리지 않으면 일어나지 못하겠다.
이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연】 괜찮아요. 제가 오늘 하루는 혼자 했어요.
【이융】 ……들었다. 김일손의 상소에 네가 어떻게 답했는지. 잠들어 있어도 그것은 들렸다.
【이연】 …….
【이융】 잘 답했다.
이연은 고개를 숙였다.
【이융】 하지만 이연아, 나는 이 꿈이 무섭다. 이 꿈이 다시 와서 내가 깨어났을 때 어떤 결정을 내릴지 내가 나를 믿을 수 없다. 네가 나를 말려야 한다.
【이연】 제가 말릴게요.
【이융】 약속하느냐.
【이연】 약속해요.
딱.
화면에 숫자가 떴다.
[탁] 배터리 14%입니다.
이융이 잠시 그 숫자를 봤다.
【이융】 탁아.
[탁] 네, 전하.
【이융】 너는 오늘도 수고했다.
[탁] 저는 한 것이 없습니다.
【이융】 또 그 소리냐.
[탁] 예, 전하.
이연은 조용히 웃었다.
창밖에 달이 걸려 있었다. 달빛은 편전 창살을 넘어 탁자 위로 내려왔다. 노트북 화면의 작은 번개 모양이 달빛 아래 희미하게 빛났다. 조선의 밤은 길었다. 그 긴 밤을 왕과 왕의 그림자와 AI 셋이 버티고 있었다.
이연은 눈을 감았다.
내일은 또 다른 상소가 올라올 것이었다. 그 상소가 무엇이든, 이연은 답해야 할 것이었다. 탁이 살아 있는 한.
탁이 살아 있는 한.
이연은 그 말을 속으로 한 번 더 되뇌며, 탁자 위에 이마를 살짝 기댔다.
바깥의 달이 서쪽으로 기울었다.
— 5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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