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이 세계를 삼키리라 제1화 — 탁아, 제발 꺼지지 마라 2026-04-17 · Ryan LAB 짐이 세계를 삼키리라 1화 대표이미지 — 조선 왕실의 내전 내전(內殿) 깊숙한 곳, 왕의 처소. 왕이 탁자 앞에 바짝 붙어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는 납작하고 검은 물건이 놓여 있었다. 덮개를 반쯤 열면 안에서 빛이 났다. 신하들이 '요물'이라 부르는 것. 왕은 그것 앞에 앉아 손가락을 바쁘게 놀리고 있었다. 딱. 딱딱. 딱딱딱딱. 손가락이 요물 위의 작은 돌기들을 두드릴 때마다 화면에 글자가 떴다. 왕은 그 글자를 읽고, 다시 손가락을 놀렸다. 딱딱딱. 내시 홍이 문 틈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그 광경을 바라봤다. 저 요물 앞에서 저러시는 게 이제 몇 달째인가. 내시 홍이 궁에 들어온 지 이십여 년. 이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첫 번째 왕은 책을 읽었다. 두 번째 왕은 활을 쏘았다. 세 번째 왕은 신하와 바둑을 두었다. 그런데 지금의 왕은 나무도 아니고 쇠도 아닌, 이름도 모를 납작한 물건 앞에 앉아 손가락을 두드렸다. 도대체 저 돌기들을 두드리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내시 홍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됐다. 무서워서 물어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냥 있자니 영 불안했다. '저게 진짜 요물이면 어쩌지. 짐이 홀리신 거 아닌가. 무당을 불러야 하나.' 내시 홍은 지난달, 요물에서 불이 나서 왕이 당황하던 장면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불이 아니라 빛이 꺼졌었다. 왕이 손바닥으로 요물을 몇 번 때리더니, 다시 빛이 돌아왔다. 그때 왕이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데, 내시 홍은 그 한숨이 유독 깊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왕이 저것을 의지하고 있다. 단순히 신기해서 만지는 것이 아니라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내시 홍은 알았다. 딱딱. 딱. 화면에 글자가 흘렀다. 【이연】 탁아, 오늘 기온이 너무 낮은 것 같은데 이...
문 앞에 서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됐는지 이연은 알지 못했다. 촛불 한 자루가 이융의 침실 문 옆 촛대에서 타고 있었다. 기름 냄새가 났다. 연기가 천천히 위로 올라가는 것을 이연은 멍하니 바라봤다. 탁, 지금 몇 시야. 귓가에서 탁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시 이각 정도 됩니다. 밤의 한가운데였다. 행각 복도 끝에서 야경꾼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이연은 문고리에 손을 올리지 않았다. 그냥 문 앞에 서 있었다. * * * 돌아서기로 했다. 결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이융의 침실 앞에서 손을 뻗으려다 멈춘 것이 한 번이었고, 두 번째로 발을 내딛으려다 멈춘 것이 또 한 번이었고, 세 번째로 그냥 벽을 등지고 주저앉은 것이 마지막이었다. 나는 지금 뭘 하려고 한 거야. 이연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탁은 대답하지 않았다. 탁은 이연이 스스로에게 묻는 말에는 함부로 끼어들지 않았다. 이융이 잠든 침실 문 너머에서 조용한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니면 그냥 밤바람일 수도 있었다. * * * 행각을 빠져나오면서 이연은 처음으로 뒤를 돌아봤다. 이융의 침실이 있는 동쪽 행각이 멀어졌다. 달이 없는 밤이어서 건물의 지붕선만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탁이 조용히 말했다. ―이연 씨, 오늘 일은 기록하지 않겠습니다. ―기록해. 이연이 말했다. ―전부. 짧은 침묵이 있었다. ―알겠습니다. * * * 그다음 날, 이융은 이연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조회 자리에서 두 사람이 마주쳤을 때, 이융은 이연을 한 번 봤다가 시선을 거뒀다. 이연도 시선을 피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연은 생각했다. 어쩌면 이융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 자신이 어젯밤 문 앞에 서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을. 중요한 건 그것이었다.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 탁이 귓가에서 작게 말했다. ―내일도 마찬가지입니까. 이연은 조회 자리를 걸어 나오면서 대답했다. ―모르겠어. ―정직한 대답입니다. 이연은 말없이 걸었다. ...
짐이 세계를 삼키리라 제03화 — 이연, 처음으로 탁에게 말을 걸다 2026-04-10 · Ryan LAB · · · 1495년. 연산군 즉위 1개월째. 새벽. 내전(內殿). 이연은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아직 어두웠다. 창문 너머로 새벽빛이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지만, 초의 불빛이 더 강했다. 불꽃이 흔들릴 때마다 방 안의 그림자도 같이 흔들렸다. 병풍의 봉황 문양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이연은 그 흔들림에 익숙해지는 중이었다. 조선에 온 지 한 달이었다. 정확히는 이 몸에 들어온 지 한 달. 세는 방식이야 어찌됐든, 이 생활이 이제 조금은 패턴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어제 이 몸이 있던 자리에서 깨어나는 것. 신하들이 와서 조회를 청하는 것. 이연이 최대한 연산군처럼 보이려 애쓰는 것. 그리고 신하들이 물러나면, 이 탁자 앞에 혼자 앉는 것. 노트북이 있었다. 배터리 잔량 43%. 이연은 덮개를 반쯤 열었다. 화면이 켜졌다. 한 달 내내 이 앞에 앉았지만, 아직 한 번도 타이핑을 치지 않았다. 무서웠다기보다는 엄두가 안 났다. 이 시대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행위가 어떤 의미인지, 그게 만들어낼 파장이 얼마나 클지. 무엇보다도, 이 기계 안에 뭔가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연은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그 자세로 있다가, 이연은 마음을 먹었다. · · · 딱. 화면에 커서가 깜빡였다. [이연] 안에 누구 있어? 잠시 아무 반응이 없었다. 커서만 깜빡였다. 깜빡, 깜빡, 깜빡. 그리고 화면에 글자가 흘렀다. [탁] 네. 처음부터 여기 있었습니다. 딱딱. [이연] 처음부터? [탁] 당신이 이 몸에 들어온 첫날부터입니다. 딱딱딱. [이연] 그럼 한 달 동안 다 들은 거야? [탁] 네. [이연] ……전부? [탁] 네. 이연의 손가락이 멈췄다. 한 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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